온세상의 하나님

[스크랩] 요 16장 : 성령이 오시면

갈렙같이 2011. 8. 19. 13:42

제 16장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31년 4월, 예루살렘에서)


16장은 15장의 연장입니다. 즉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말씀의 연장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그것이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뿌리가 같으며 목질이 같으며 그 속을 흐르는 진액이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비유합니다. 즉,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가 바로 그 분의 것과 같아야하며 그 분을 표현하는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한 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되지 않는 이유는 옛사람, 즉 첫 아담이 내 안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부단히 죽여야 할 대상이며 그러지 않고서는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접붙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핍박을 받으리라.(1-4)

주님은 제자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날 밤에 그들이 핍박을 받을 것임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강조하시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절)

이유를 알아야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르고 당하면 “내가 왜 이런 핍박을 당해야하는가?”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4절)


그러면 제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불행히도 종교조직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2절)

그들은 제자들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께 예물(suffering service)을 드리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2,000년 동안 자행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신약적인 교회를 이루어온 많은 신자들이 카톨릭에 의해, 개혁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수효가 6,800 만 명이 넘는다고 교회사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 얼마나 더 죽어야 될지 모르지요. 오늘날 미국에 퓨리탄 정신이 사라지고 카톨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면 앞날에 먹구름이 끼이는 듯합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제자들을 핍박할까요?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제자들이 믿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을 믿고, 그들은 마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느니라.”(요8:44)고 말씀 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마귀를 섬기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3절)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종교는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성공을 희구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의 열정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희구합니다. 또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깁니다.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떠나가심이 유익한 이유 (5-7)

예수님이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에게로 가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근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7절)

예수님은 떠나가시지만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과 임무교대를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차라리 더 잘 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일생을 걸고 따른 예수님인데...그 분이 살아계셔서 항상 같이 계시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몸을 가진 예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을 하실 수가 있기 때문에 더 유익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곁에는 계실 수가 있었지만 제자들 속에는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만 성령님은 오시면 제자들 속에도 계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함께>와 <속에> 거하시니 <함께>만 계실 수 있었던 예수님 보다는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좋은 상태를 가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하나가 되는 실제적인 비결은 성령님께 달려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야만 그리스도와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제자들 안으로 오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떠나가심은 필수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실 사역 (8-11)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성령께서는 책망하는 일을 하십니다.

“책망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엘렝코]로 발음되는데 “책망하다, 밝히 드러내다. 바로잡다, 비난하다”등의 뜻이 있는 말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잘못을 깨닫게 하여 바로잡을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바로 잡아주고 세워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망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절)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일 중의 하나는 죄에 관한 것인데...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책망하신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 죄에 대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않는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살인, 간음, 도둑질...등의 많은 것들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죄의 열매들일 뿐입니다. 그런 일들을 행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거역심(불순종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셔서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 자체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고집은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의 제스처를 거절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의에 대한 책망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0절)

의에 대하여 책망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책망한다”는 의미보다는 “밝혀 드러낸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18:15에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의 ”권고“가 [엘렝코]입니다.

은밀하게 죄를 지었어도 성령께서는 그것을 “드러내고 권고하셔서” 회개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의롭게 살지 못할 때 성령께서는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대신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이 말씀처럼 비록 예수님이 안 계시더라도 성령께서는 일러 주시고 권고하셔서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에 대한 책망

“심판에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11절)

성경은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증거 하실 때 마귀는 이미 하늘에서 번개와 같이  떨어졌으며(눅10:18)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없이함을 받은 것입니다.(히2:14)

이렇게 마귀는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멸망을 받았으니 그 마귀 수하에 있는 모든 자들이 저와 같은 운명에 처해졌음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귀가 심판을 받은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과 죄에 대하여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심판이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의 지배 하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느니라.”(골1:13)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3-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비밀은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아직은 부족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12절)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세상에 계실 때는 그 시공간의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영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다 가르치실 수가 없으십니다. 인간 역시 유한적인 존재로써 그 모든 것들을 배울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절)

성령께서는 영이시므로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는 까닭에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더욱 효과적이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결코 예수님을 능가하여 가르치시는 건 아닙니다. 결코 자기 뜻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 즉, 진리만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4절)

여기에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본래는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것은 또한 아드님의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5절)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왕왕 성령님을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 인해 아드님보다 더  사모하고 찬양한다거나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하거나, 그분의 은사를 간절히 추구함으로써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의도에 매우 역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도 아버지의 것이지만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7)

이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사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과 출생의 기쁨 (16-21)

예수님은 석별의 강화에서 가시겠다는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곧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16절)

이 말씀은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할 것이지만 또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19-20)

해산의 고통과 출생의 기쁨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여자들은 해산의 날이 다가오면 심히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그것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신자가 거듭나기 위해 지불하는 <해산의 고통>도 극심합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있게될 새로운 탄생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21절)


출생의 결과 (22-24)

새로 태여 난 결과는 무엇일까요?

1)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너무 커서 해산의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게 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2절)


2) 예수님께 묻지 않게 됩니다.

“그날에는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23절)

예수님께 묻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더 이상 근원적인 질문은 없을 만큼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진리의 길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길을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14:5)와 같은 질문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자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3) 구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주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구해지는 것은 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며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제자들은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함께 깨여 있어 기도하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제자들 속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거하시게 되면 진정으로 예수님의 뜻에 맞게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합당한 기도의 결과는 기쁨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4)비사(比辭)가 필요 없어지게 된다.

비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싶을 때 사용하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비사(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천국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오시는 고로 비사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는 비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성령께서는 성장수준에 맞게 알아야할 것은 알려 주시고, 깨달아야할 것은 깨닫게 해 주시므로, 조급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선생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생을 만나는 것도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선생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만나게 해 주신 분 아래에서 겸손하게 배워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선생을 만나게도 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2:27)의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선생이 필요없다는 말로 인식될 수 있으나 바로 앞 구절을 참조하여 보면 “아무도”라는 말은 “미혹케 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미혹하는 자들(거짓선생들)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은 기름 부음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하여 눈이 떠있지도 않고 깨달음도 없으므로 그들 중에서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는 “일만 스승”(고전4:15)도 있다고 말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도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히5:12)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가르치는 직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말씀을 선생이 필요 없다는 말씀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느 부분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은 아직은 깨달을 만큼 성장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더욱 성장토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비사 없는 가르침(25-30)

예수님은 비사 없는 쉬운 말로 직설법을 사용하여 가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 밤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 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29-30절)


이 말씀은 모든 제자들이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말씀 중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고백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부분  공중강론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 비사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에는 그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숨기지 않으시고 직설법을 사용하여 긴 강론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졌던 예수님의 출처와 귀환처 등. 약간의 의혹들이 모두 풀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였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혼자 둘 때가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성령께서 저들과 함께하지 아니하신 까닭에 그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만한 순교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경륜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이 응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렘25:34)

 

환난중에도 담대하라 (31-33)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2-33)

석별의 밤, 마지막 강론은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미 정복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이것을 미리 보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은 미래의 사건을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볼 수 있게 만들므로 마귀의 위협과 핍박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출처 : 요르단(Jordan) 강
글쓴이 : 갈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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