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상의 하나님

[스크랩]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

갈렙같이 2011. 7. 23. 22:49

예수님께서 태여나신 사건을 두고 주전 700년 경에 살았던 이사야는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사7:14)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뜻이지요.

이 말의 원의는 구약의 성막에서 유래됩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회중들의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죠. 민수기를 보면 성막을 가운데 두고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주위에 포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막이 저희들의 가운데 위치해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고 생각하고 좋아 했었죠.

 

예수님은 바로 그 성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을 보듯히 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반대로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 분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모든 면에서 사람들을 대신하고 또 사람들과 사귀시기 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 속에 오셔서 사람들과 교제하시고, 사람들을 이해하시고, 사람들의 문제점을 파악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부대에 한 군목이 사병들 막사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의 병영생활의 애환을 듣고 적절한 도움을 베풀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장교 계급장을 떼고,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병사들은 일단 그 모습에 반가움을 금치 못했지만 어떤 고참이 말했습니다.

"군목님이시다. 그러니 일등병 계급장을 보지말고, 절대 장교에 대한 예의를 갖추거라"

 

이 말 한마디는 병사들과 군목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습니다.

군목이 하는 말에 그들은 "네, 알겠습니다"  "네, 시정하겠습니다. " 라는 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진솔하고 친근한 대화나 사귐은 불가능했습니다.

고참병의 한마디는 계급장까지 떼어낸 군목의 의도를 좌절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교제하고 사람을 변화시켜서 사람을 구원하려고 사람이 되어 오셨건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으로 격상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친구가 아닌 일약 숭배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교제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추종이 아니라 혹시 벌이나 주고 지옥에 보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하는 굴종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은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좌절시킨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왜 낮고 천한  마구간에 오셨는지, 왜 가난하고 멸시받는 고장에서 자라나셨는지, 왜 병자들과 죄인들과 어울리셨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만들어 놓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입술로나 고백하고 찬송하는 숭배자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 좋아하는 친구들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The Word became flesh...)(요1:14)

"몸(body)이 되어..."라고 말하지 않고, "육신(flesh)이 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가죽만 뒤집어 쓰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마음도 생각도 우리와 똑 같으신 분이 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면서, 같은 것을 먹으면서, 같은 인생을 사시면서, 동료가 되시고, 친구가 되시고, 교제하시고, 우리를 참으로 이해하시고, 우리를 완전히 대신하셔서 죽으시기 위해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지존하신 신으로 만들어 버렸고,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기록 네가지(마태,마가, 누가,요한복음) 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중 세가지가 그분의 인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그분이 인성을 취하시어 사람으로 오신 것이 강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그 분을 너무 신성에 치우쳐  숭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은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다시 예전 있던 아버지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성을 벗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지금도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가지신 분으로써 그리스도(대리통치자)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본래 영원히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우리와 진솔하게 친구가 되실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과 교제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출처 : 요르단(Jordan)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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