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상의 하나님

[스크랩] 히브리서 10장 : 율법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제사. 그리고 그 후

갈렙같이 2011. 8. 10. 01:05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율법에 의해 드리던 제사와 그리스도로 인한 제사의 결과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제사(1-1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런 율법에 의해 드리는 제사가 실효성이 있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제사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 온전케 못한다는 것은 죄짓기 전 상태를 완전히 회복시켜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2)

온전케 하지 못하는 단적인 예가 죄책감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그 기억과 느낌이 뇌리에 남아 늘상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죄책감으로 부터 해방을 받고 싶어서 자백도 하고, 보상을 하고, 제물을 드리고, 때로는 선행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 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완전히 씻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3-4)

 

 이것은 구약의 제사가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약의 제사가 실효성이 있어서 죄의식과 죄의 세력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줄 수 있었다면 더 이상 제사는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같은 제사가 되풀이 되었으니 이것은 죄의 속죄가 완전치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40편에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5-7)

 

이것은 구속언약이라는 것으로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전 하나님과 사이에 맺으신 언약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제물이 되어 죽으실 것과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죄없는 몸(흠없는 제물)을 제공해주실 것이 약속되어진 것입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하였고(이는 다 율법으로 드리는 것이라)  그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8-9)

 

하나님의 뜻은 두째 것을 세우시는 일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통해 인류를 영원히 속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  당연히 첫 것은 폐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 째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9-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거룩을 원하시므로 그 뜻을 좇아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이로인해 우리는 거룩을 입었습니다. 이러므로써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로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11)

율법에 의해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들은 서서 섬겼습니다. 죄들은 넘쳐났고 그 때마다 새로운 제물을 드려야 했기 때문에 그 때의 제사장들에게는 앉아서 쉴만한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회막과 성소 안에는 제사장들이 앉아 있을 의자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12-18)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12-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 제사를 드린 이후에 더이상 서 계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 왕으로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기다리시나니"라는 것은 헬라어로 [엨데코마이]로써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원수들(변화받지 못한 사람들 속에 있는 마귀)이 복종하기를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 마귀는 그의 발등상이 되어질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후에..."(14-16)

 

온전케 된 사람들은 새로운 언약이 이루어진 자들입니다. 즉, 주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법(율법)을 타율적으로 지키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율적으로 지키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렘31:31-34)는 미래사건이 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과거사건이기 때문에 그 때로 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현재완료상태가 되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는 나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차이가 나서 순종하기가 쉽지않고 갈등이 많았지만, 이제는 내마음에 주의 법이 기록이 되어 있으니 주의 뜻이 내 뜻이 되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저희 죄(sins)와 저희 불법(iniquities)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 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17-18)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다시 죄를 인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죄를 위한 헌물(offering)이 더이상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짐승제사가 필요하지도 않고, 미사같은 이상한 제사도 필요없는 것입니다.

본래 죄가 없었던 에덴에는 제사가 없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가 다 처리된 지금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예배는 더이상  죄로 인한 제사가 아니고 영과 진리로 자신을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필요할 뿐입니다.(롬12:1-3)

  

그러므로 성소에 들어가자!(19-22)

그리스도의 제사로 인해 영단번 속죄와 거룩함을 얻고, 완전케 된 성도들이 더이상 할 일이 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the holiest:kjv)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9-20)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성소에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제사제도에 의할 것 같으면 일반인들은 절대로 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가 거룩한 자들이 되었으므로 마치 제사장들 처럼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 보좌 앞에 까지 자유롭게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성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우리도 말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도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몸이 이미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전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길이 우리 마음성전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계시는 성전된 그 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으로 인해 우리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즉 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뿌림으로써 지성소가 성별되듯(레16:14-20) 우리의 마음성전이 거룩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심이 악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물로 몸까지 씻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참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으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필요함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3장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때에 언급했던 말이며(19절), 11장에 가서 다시 강조할 주제입니다.

 

교회를 세우라(23-39)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23-25)

주님을 모신 자들은 자칫하면 자기 만족에 빠져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율법준행과 죄의 해결과 자기공로를 세우려는 모든 의무로 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해방자의 자유에 머물러서 공동체를 등한히 여기고 주님과의 교제에만 빠져 있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서 사랑의 공동체(나라)를 세워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돌아보고, 선행을 격려하여야 하며 특히 모이기를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26-27)

이 말씀은 6장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입니다. (6:4-6)

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늘의 은사와 빛과 말씀의 능력까지 맛본 사람이 뜰도 아닌 회막 바깥에 까지 나가서 범죄하는 삶을 산다면 더 이상의 사죄가 있지 않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배은망덕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29)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도 두세 증인이 있으면 죽임을 당하였거든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모독한 사람이야 피할 도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속죄를 빙자한 나머지 잘못된 자유방임에 빠져 버리면 그 결과는 오히려 그 진리를 알지 못했던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31)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32-35)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세상으로 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이방인이요, 객이 되었으므로 세상의 임금인 마귀가 이제 핍박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는 구경거리가 될지라도 당연지사로 알고 참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환경가운데 있는 형제들과 교통하면서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보이는 산업을 빼앗긴다고 할지라도 미련을 갖지말고 영구한 하늘에 있는 산업(유업)을 약속으로 받은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잠시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7-40)

"잠시 잠깐 후면"은 "For yet a little while" 로써 "잠깐 아직"이란 뜻으로 매우 짧은 기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실 이가 오시리니" 역시 "He who is coming will come"으로써 "오고 계시는 분이 오실 것이다"란 뜻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은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는 상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자들도 볼 수 있는 가견적이고 역사적인 주의 재림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신자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본절의 핵심은 어떤 상황하에 있던지 간에 성도와 교회는 주님이 곧 오실 것을 소망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후퇴하여 침륜(destruction)에 빠지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오직 전진만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전진이란 혼(soul)을 보존(save)하는 것입니다.

혼이 다시 더럽혀지고, 강퍅해지지 않도록, 언제나 영의 지배하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출처 : 요르단(Jordan) 강
글쓴이 : 갈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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